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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20 천명관 - 고령화가족

 


고령화 가족

저자
천명관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4-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희대의 이야기꾼 천명관의 두 번째 장편소설!희대의 이야기꾼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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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가 읽은 세번째 천명관 작가의 소설이다.

천명관 작가의 글을 굉장히 흡입력있다.

이야기들은 대체로 더러운 것 같으면서도 따뜻하고

표현이 거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달까.

 

아, 뭐라노.

 

하여간 무언가를 읽거나 혹은 보거나

그 후에 느낌을 말하는 일은 내겐 아직도 너무나 어렵다.

 

-

.

엄마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하다

갑자기 생각난 듯 불쑥 물었다.

- 닭죽 쑤어놨는데 먹으러 올래?

이 대사는 서너 번 전화하면 반드시 한 번쯤은 등장하는 레퍼토리였다.

메뉴는 대개 닭죽이나 잡채, 콩국수 같은 평범한 음식들이었지만 엄마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면 특별식인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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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오함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다 온 집 안에 비린내가 진동한다

며 투덜댔다. 엄마가 방금 전 프라이팬에다 큰 자반고등어 한 마리를 구

웠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퍼뜩 그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것이 오래 전, 집에서

자주 벌어지던 소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를 포함해 식구들은 모두 비린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나는 유독 고

등어나 갈치 같은 비린 생선을 좋아해 엄마는 식구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

구하고 순전히 나를 위해 자주 고등어를 굽곤 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상

위에 올라와 있는 반찬들이 모두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욱국과 고들빼기김치, 조개젓과 감자조림, 뱅어포 등 무엇 하나

특별하달 게 없는 음식들이었지만 이십년이 넘은 그때까지도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잊지 않고 용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갑

자기 코끝이 찡해져 식탁 위에 고개를 박고 서둘러 수저를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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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마도 끝내 해답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한 길 물속보다 얕은 좁은

변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복잡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예컨대, 물 위에 뜨는 똥과 바닥에 가라앉는 똥은 무

슨 차이가 있는지, 똥구멍이 찢어져 일주일 내내 볼일을 볼 때마다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 변기 안을 시뻘겋게 물들이는데도 죽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한번은 똥이 사라진 적도 있었다. 볼일을 마친 뒤 물을 내

리려고 보니 변기 안에 똥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똥을 누었는데 도대체 그

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배수구 안쪽으로 숨었나 싶어 무릅을 꿇고 앉아

아무리 뒤져봐도 변기 안은 깨끗했다. 분명 똥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꼈

고 밑을 닦았을 때 휴지에 변이 묻어 있는 걸 확인했는데도 똥의 행방은 묘

연했다. 도대체 변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야말로 '<식스센스>

이후 최대의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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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보통사람들의 인생에 이토록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순간은 얼마나 될까?

가슴이 터질 듯한 환희와 기쁨, 혹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과절의 순간은

얼마나 자주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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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잘생긴 얼굴을 '니주가리 씹빠빠'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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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기론, 사랑이란 여자의 입장에선 '능력 있는 남자에게 빌붙어서 평생

공짜로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

를 건강하게 낳아 양육해줄 젊고 싱싱한 자궁에 대한 열망'일 뿐이었다. 우울

한 얘기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사랑

이야기는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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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면은 역시 삼양라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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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던 과거와 화해하고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또한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었지만 패티김의 노래가 울려퍼지던

그날 아침만큼은 우리 집도 평화로운 가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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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내가 술에 취해 사는 동안에도 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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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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